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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김위 장군과 첨금정 - 이순신의 심복, 총애 받던 부하

[김위 장군과 첨금정 - 이순신의 심복, 총애 받던 부하]




흔히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부르는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에서 연전연패를 하는 가운데도 연승신화를 써내려간 독보적인 수군통제사였다.

그런 이순신이 아끼던 심복은 역사에 기록된 자도 있고, 기록되지 않은 이름없는 자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총애를 받던 부하 중에 김위 장군은 이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아까워했던 장수였다. 김위는 1567년 ~ 1597년에 생존했으며 겨우 30의 나이에 전쟁 중 생을 마쳤다.


이 김위 장군에 얽힌 것이 '첨금정'이라고 한다. 첨금정의 위치는 전북의 고창인근에 있다. 정확한 첨금정 위치는 고창군 무장면 송현리 송현마을이다. 그것도 논 한가운데 서 있어서 관리가 아쉬운 역사유적이기도 하다. 일명 '기훈암'으로도 불리는데, 기훈암이란 "공을 기리기 위한 바위"라는 뜻이다.



첨금정에 있는 기훈암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만력 25년 10월, 통제사 이순신의 명령"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이순신이 심복이자 총애하던 부하 김위의 장례를 치른 후, 묘 앞의 바위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첨금정에는 두가지 설이 있으니, 판단을 필요로 한다. 첫번째 설은 이순신 장군이 총애하는 부하이자 심복인 김위 장군에 대한 설이다. 즉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첨금정의 유래는 김위 장군을 위해 눈물을 흘린 것에서 유래한다는 설이다.


김위 장군은 이순신 장군이 총애하는 부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잠시 끝난 후 1957년 왜군은 14만 대군을 몰고 다시 침입했으니 이를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김위 장군은 어려운 전쟁 속에서도 이순신을 충실하게 도와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순신의 심복 김위 장군은 진하장으로 임명되어서 1597년 진도전투에 참가하였다. 하지만 김위의 운명이 다 했는지, 적군의 독화살을 맞고 순절하고 말았다. 이순신은 전투가 끝나자 출장길에 직접 관 입관식에 참석한 후, 현재의 첨금정이 위치한 김위의 본가까지 호송했다고 한다. 이순신이 김위를 얼마나 총애한 부하로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순신은 묘 앞의 바위에 걸터 앉아서 갑옷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이 지경이 된 상황을 한탄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김위의 순절비를 첨금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 첨금정의 유래이다. 첨금정의 위치는 고창군에 있는데, 첨금정의 뜻을 한자에서 알아보면 沾襟亭이라 하여, 옷깃을 적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첨금정의 유래는 슬퍼서 울었다는 전설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이 심복을 극진히 아끼며 눈물까지 흘렸다는 첨금정의 유래와는 달리, 그 곳에는 원래부터 '첨금처'라는 것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이 첨금처의 설은 1917년에 작성된 무장읍지라는 책에 기록된 것을 발견하여 증거로 제시되고 있는 중이다. 무장읍지 뿐 아니라, 관찬지리지, 여지도서에는 송별할 때 일가족이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고 해서 첨금처라는 유래가 생겼다고 한다. 즉 고려시대부터 첨금처라는 지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왜 이곳이 첨금정이 아니라 첨금처였는지는 행정적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궁궐에 상납을 하는 농산물이 모이는 집성지였었다고 한다. 더구나 이곳은 고려시대에 천민들이 있던 특수지역도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전쟁이 나면 징병된 사람들이 이곳에 모였다가 떠나게 되었는데, 죽음을 향한 이별이다보니 눈물로 보낼 수 밖에 없어서 첨금처라고 했다는 설이기도 하다. 이때의 첨금처의 뜻도 첨금정의 뜻처럼 눈물로 옷깃을 적시었다는 의미이다. 


이순신이 총애하는 심복을 위해 울었던 것이 첨금정의 유래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측에서는 이렇듯 고려 때부터 있었던 문헌을 제시하며, 어떻게 해서 지금의 순절비에 이순신의 명이라는 글자가 새겨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도 한다. 


주장에 의하면, 이순신이 첨금정이 위치한 고창군 무장면 송현리의 순절비가 사실은 약 백여년 전인 구한말에 유적의 관리가 잘 되지 않던 시절의 틈을 타서 후손들이 새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즉 이순신이 무장면에 왔다는 기록도 없고 오히려 후손들이 스스로 이순신의 명이었던 것처럼 했을 가능성이 더 높은 증거만 있다고 하는 것이다. 


비록 순절비인 첨금정에 대한 갑론을박은 있지만, 어찌되었든 김위라는 사람이 임진왜란, 정유왜란 당시 존재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한 기자의 추적에 의하면 김위 장군은 그 선대부터해서 무려 3대가 임진왜란 중에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내 놓은 가문이라고도 한다. 


왜군이 경상도를 격파하고 전라도로 진격하던 때, 남원성에서 조명 연합군은 끝까지 싸우다가 전멸하였는데, 이 전투가 무장면 송현리 김해 김씨 문중의 형제였다고 한다. 그들의 이름은 김천록과 김천귀였다고 하는데, 끝내 순절한 후 김천록의 아내마저 뒷산에 올라가서 자결을 하고 마는 슬픈 사연이 생기고 말았다. 


양친 부모가 사연을 품고 죽어버리자 그 아들 김위와 김현이 이순신 삼도수군 통제사의 부대에 들어가서 진도전에서 싸우다가 역시 목숨을 잃고 말았다고 한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들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다가 죽은 후, 김위 장군의 할아버지인 김수연은 노량해전에 출전했다가 또한 장렬히 전사했다는 것이 그 기사의 내용이었다. 



충무공 이순신이 총애하던 부하 김위의 공적이 적힌 첨금정은 자연석의 고인돌이라고 한다. 이곳에 김위와 김현의 순절을 기르기 위해 순절비가 세워진 것이다. 이순신의 심복인 김위 장군은 겨우 30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지만, 부하를 아끼고 보살피는 이순신의 면모가 함께 전설이 되어 남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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